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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창조주가 아니다! 신이 탄생하는 과정 최초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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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149,182회  2021. 11. 16.  


인간은 약육강식의 생태계에서 피라미드의 정점에 올랐지만 여전히 나약하며 위태롭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정복했다는 자연은 생태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주를 넘어 시공까지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늘 피조물의 한계를 절감하며 그것을 뛰어넘을 방법을 모색해 왔습니다. 그리고 찾아낸 결론은 바로 神이었습니다. 완전무결한 존재인 神이 구원을 통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구체화한 것이 유일신 종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神이 구원을 해준다는 보장을 어떻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가령 현대사회를 일러 신용사회라고 합니다. 신용이 토대가 되어야 금전거래를 비롯한 여러 가지 사업을 함께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神 역시 신용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神이 정말로 구원을 해 줄 의향이나 능력이 있는지부터 알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려면 첫 번째 神의 족보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스스로 존재하는 창조주인지, 아니면 힘깨나 쓰는 天神이나 山神의 부류인지, 그것도 아니면 사람이나 홀리면서 사는 일개 잡신인지를 따져봐야 합니다.


만일 첫 번째 창조주라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원인 없이 스스로 존재하는지를 증명해야 합니다. 무조건 믿으면 된다는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가선 안 됩니다. 하지만 여태껏 창조주의 自存에 대한 설명은 아예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점이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神이 어떻게 해서 탄생하게 되었는지 말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동양철학에서는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에서는 단예 선사가 풀이한 동양철학적 神의 화생론(化生論)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가령 어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우선 도화지부터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도화지는 만물의 바탕을 빗댄 것으로, 이것을 불교에서는 空, 道家에서는 谷이라 각각 칭합니다. 도화지만 있으면 그 어떤 것도 창출될 수 없겠지요. 그런데 기이하게도 도화지에 어느 순간 물과 물감이 생겨납니다. 그 이유는 다음 기회에 다루겠지만, 간단히 말해 도화지와 물과 물감이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물은 없애려는 힘으로 無力이고, 물감은 있게 하려는 힘으로 有力입니다. 도화지 위에 無力의 물과 有力의 물감이 뒤엉키게 되니 순전히 카오스 상태입니다. 이 두 힘만 있다면 영원히 추상화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의 힘이 더 있습니다. 그것은 도화지 자체가 지니고 있는 어떤 힘입니다. 도화지는 모든 그림을 담으려는 성질이 있습니다. 이것을 일러 용력(容力)이라 합니다. 이 容力이 無力과 有力에 배어들면서 카오스 상태에 조금씩 질서가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容力은 붓에 빗댈 수 있습니다.



容力은 계속해서 뭔가를 담으려고 하고, 그러다 보니 無力과 有力이 원운동을 하며 하나의 유기체로 이어지게 됩니다. 가장 많이 담을 수 있는 구조가 원(圓)인 까닭이지요. 無力과 有力은 더 많이 담기 위해 균형을 이루며 원운동을 지속하니 어떤 뚜렷한 성질을 띤 것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런 것들이 넓게 펼쳐지면서 4차원 상계(象界)가 형성됩니다. 그런데 容力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더 많은 것을 담으려 합니다. 그러다 보니 기운들은 계속해서 농축하고 더 이상 4차원에서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이때 궁극에 이르러 4차원의 한 지점이 폐쇄되어 응축됩니다. 4차원에 대한 반발력이 생겨나는데, 이렇게 저항 값을 받아 폐쇄된 곳을 총칭하여 3차원이라 합니다. 그리고 폐쇄되어 뭉쳐진 기운들을 일컬어 물질이라 하고요.



이렇게 3차원 물질세계가 고통스럽게 펼쳐지지만 容力은 여기서도 계속해서 작용합니다. 더 많은 것을 담기 위해 원운동을 통해 질서를 만듭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더 많은 것을 담으려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전환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容力은 디지털化 된 물질, 다시 말해 생명체를 만듭니다. 그리고 그 생명체는 더 많은 것을 담기 위해 뇌의 용량을 계속해서 늘려나갑니다. DNA를 만들어 자신이 담은 것을 후대로 전해주면서 계속해서 더 많은 것을 담게 하고, 드디어 인간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인간들 가운데 모든 것을 다 담아서 더 이상 담을 것이 없는 사람이 한 명 나옵니다. 그가 바로 싯다르타입니다. 태초부터 시작된 容力의 담는 활동이 자신에 이르러 끝났다는 경이로운 선언입니다. 모든 것을 다 담았다는 것, 이것이 바로 全知이고 깨달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왜 어쭙잖은 체험들로 깨달을 수 없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간략하게나마 容力의 정보 대장정을 마무리한 싯다르타까지 살펴봤습니다. 그렇다면 容力이 무엇일까요? 이 容力을 동양철학에서는 神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無力을 氣, 有力을 精이라 각각 부릅니다. 담으려는 힘인 神과 흩어지려는 힘인 氣, 그리고 묶어 놓으려는 힘인 精, 이 세 가지 힘이 가위바위보 식으로 얽혀서 돌아가는 것이 우주변화의 원리입니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인격을 지닌 神’은 어떻게 나오게 된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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